당신이 여성을 유혹할 때 성공할 확률은? (여성 테스트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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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연애를 할 때 적극적으로 상대를 리드하기 보다는 상대방의 뜻에 따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소극적이라는 평을 많이 받는다. 말이나 행동의 실수가 적기 때문에 신중하다는 평도
듣는다. 연애의 기본 덕목은 상대의 말을 들어주는 것인데, 당신은 특별히 할 말이 별로 없기
때문에 상대의 말을 들어주기가 더 쉽다. 가끔 자상하다는 오해(?)도 받고, 많은 이성 친구가
당신에게 고민을 털어 놓기도 한다.
당신은 적극적으로 판단을 내리거나 주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연애 상대에게 우유부단하다는
평을 들을 가능성이 있다. 연애할 때는 상대방이 당신의 속을 알 수 없어서 답답해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애인에게 끌려 다니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면 불만은 쌓이고 해소할 길은 없으니 답답한 상황에 빠진다.
연애를 할 때는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뭐가 좋고 뭐가 싫은지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을 만든다면, 이후에 의사결정을 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는 장점을 살리라. 남들이 당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잘 정리해서 돌려주기만 해도
당신은 훌륭한 상담역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작곡가. 1833~1897. 아버지로부터 음악적 재능을, 어머니로부터 성실한 성격을 물려 받은 브람스는 전형적인 음악 모범생이자 경건한 신앙인이었다. 고된 정교 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후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브람스는 1853년 세계적인 거장이었던 슈만을 만나 그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게 된다. 슈만은 브람스의 천재성을 간파하고 그를 집에 초대해 한달 동안이나 머물게 했다. 슈만에겐 클라라라는 아내가 있었는데, 클라라는 남편 못지 않은 천재적 음악성에 뛰어난 피아노 연주력을 지닌 여성이었다. 슈만 부부는 브람스의 인생에 전부였다. 슈만은 브람스 음악 인생의 스승으로, 브람스는 스승 덕에 음악가로서 출세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브람스는 슈만의 아내 클라라에 연정을 품으며 그녀를 평생 짝사랑한다. 1854년 스승 슈만이 정신병으로 투신 자살을 한 뒤로 브람스의 클라라에 대한 사랑은 더욱 애절해진다. 클라라는 당시 7번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됐고, 브람스는 죽은 스승에 대한 존경과 클라라에 대한 연정으로 클라라와 그의 가족들의 생활을 평생 책임진다. 브람스는 자신보다 14살이나 연상인 클라라를 마음 속 깊이 사랑하는 까닭에 평생 다른 여자와 교제하지도 못했으면서, 스승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클라라에게 청혼을 하지도 못하고 33년간 주변을 맴돌았다. 1986년 클라라가 77세의 나이로 타계하자 브람스는 "내 인생 가장 고귀한 의미를 잃었다"며 절망에 빠졌고, 이듬해 그도 따라 숨을 거둔다.
스페인의 세계적인 건축가, 1852∼1926.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출생, 어릴 때부터 관절염을 앓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어울리기는커녕 제대로 걷지도 못해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관찰"을 하며 보냈다고 한다. 어머니는 대학 시절 돌아가셨고, 그는 이후 아버지와 여조카와 함께 살게 된다. 어머니의 죽음은 가우디에게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남겨, 그는 이후 평생 결혼도 교제도 하지 않으며 남은 가족들과 생을 함께 한다. 1911년 열병으로 죽다 살아난 가우디는 이듬해 여조카의 죽음, 그리고 구엘을 비롯한 수많은 후원자들마저 세상을 떠나자,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매달리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는 외부와 담을 쌓은 채 완전히 거지와 다름없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파밀리아 성당의 인부들과 함께 먹고 자고, 차림새는 오히려 인부들보다 훨씬 남루한 꼴이 돼 갔다. 그는 끝없이 일을 하다 지치면 길바닥에 누워서 잤고, 깨어나면 다시 일에 매달렸다. 그리고 1926년, 그는 한밤중에 길을 건너다 전동차에 치었으나 노숙자로 오인된 까닭에 병원으로 이송되지 못한 채 숨졌다. (가우디가 자신의 영혼을 바쳤고, 죽어서 그의 육신이 묻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현재 세계 각국의 모금을 통해 계속해서 지어지고 있다.)
영국의 수학자,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아버지. 1912년-1954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튜링은 어릴 때부터 수학과 과학에 비상한 재능을 보인 학생이었으나, 서툰 말투와 추레한 옷차림 덕에 항상 외롭게 지냈으며, 선천적인 동성애자로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천재 수학자였던 그는 독일군의 암호 이니그마를 해독하는 기계를 만들어 연합군이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전쟁 후에는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기초 이론 및 인공지능의 기초를 창안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의 발명자이자, 알려지지 않은 전쟁영웅 튜링은 그의 동성애 기질 때문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다. 당시 영국 법에 의하면 동성애는 명백한 풍기문란 죄였다. 1951년 어느 날 우연한 사건에 의해 튜링의 동성애 기질은 경찰들에 의해 발각됐고, 튜링은 1년의 구금형을 선고 받는다. 당시 영국에서 동성애자가 구금형을 받지 않으려면 약물치료로 형을 대신해야 했는데, 몸에 여성 호르몬을 주입하는 방법이었다. 동성애자의 성적 본능을 감퇴시켜 범죄의 재발을 막는다는 취지였다. 튜링은 감옥에 가지 않고 연구를 계속 하기 위해 호르몬 치료를 택했지만, 여성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 그의 연구 및 강연 생활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튜링은 외부로부터 쏟아지는 수모와 공공연한 조롱에 엄청난 정신적 압박을 받았고, 결국 1954년, 자신의 집에서 독극물을 묻힌 사과를 먹고 자살한다. 튜링은 조국을 전쟁의 위기에서 구한, 인류의 기술산업 발전에 거대한 이정표를 세운 영웅이었으나, 영국에선 그를 기록에 남기려는 노력조차 없었다.
아일랜드의 화가, 1909~1992. 아일랜드의 시골에서 태어나 방 심부름하는 하인, 가구 디자이너 등을 전전하다 30세가 되어서야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그는 원래 돈 있는 중산층 집에서 태어났으나 정신적으로 여성이라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나 힘든 유년기를 보내야 했다. (그는 선천적인 동성애자로, 16살 때 집에서 자기 누이 옷을 훔쳐 입다가 격노한 아버지에 의해 집에서 쫓겨났다.) 얼떨결에 독립생활을 시작한 베이컨은 런던, 베를린을 전전하며 장식 미술가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 뒤에 노름에 미쳐 돌아다니며 몇 번의 소소한 전시를 거치다 전업작가로 전향한다. 기본적으로 베이컨은 지독히 폐쇄적인 완벽주의자로, 마음에 안 드는 그림 수백 점을 파괴했으며, 한 작품에 오랜 세월 매달리며 일부는 평생 완성시키지도 못했다. 그는 마구간을 개조해 만든 작업실에서 1961년부터 죽을 때까지 단 한번도 청소하지 않은 채,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으며(심지어 그림 모델과 같이 있는 것도 매우 싫어했다), 자폐증 환자처럼 창작에 몰두했다. 그는 작업실에 쌓이는 먼지를 방치해 먼지와 물감이 버무려져 발생하는 "특수 효과"를 만들어 내기도 했으며, 3일 넘게 수염을 깎지 않은 얼굴에 물감을 발라 붓 대신 쓰기도 했다. 아무런 교육도 받지 않은 채 바닥부터 시작한 그의 그림은 무시무시한 잔혹성, 엽기적 비주얼을 특징으로 하면서도 그 안에 엄청나게 심오한 철학적 깊이를 담고 있다. 그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화가에 속하며, 20세기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화가 10명, 그리고 그 중 최고의 창조자로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