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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3주년이 지나도록 우리 사회에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린다'는 속설이 상식처럼 굳어져 있다. 과연 현실은 어떨까. < 시사IN > 은 이 속설이 믿을 만한지 알아보기 위해 그 실상을 직접 들여다보기로 했다.



조사 범위는 매국 조약 체결 등에 가담해 그 대가로 귀족 작위와 은사금, 은사 토지를 하사받은 매국형 친일파 10여 명과 그 후손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또 일제 식민지 통치기구의 국회 격이라 할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참의를 지낸 상당수 친일파 후손도 살펴보았다. 대표적 친일파 명단을 놓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족보를 추적해 확인 가능한 후손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방법으로 진행했다.

독립운동가의 경우는 임시정부 요인과 기미독립선언에 참가한 33인 대표, 그리고 안중근 의사와 도산 안창호 선생, 단재 신채호 선생 등 민족의 선각자들 후손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20~25쪽 딸린 기사 참조).

결론부터 말하면 3대 이상 흥한 '대표 친일파' 후손은 '대표 독립운동가' 후손보다 훨씬 많았다.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흥한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잖은 친일파 후손이 사회 각계에 포진해 대를 이어 기득권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선 매국 조약 체결 등으로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친일파부터 살펴보자. 구한말 군부대신으로 을사늑약을 조인하고, 1910년 한·일 병탄 조약 체결에도 간여한 을사오적 이근택의 집안은 대표 친일파 가계로 통한다. 그의 형 근호와 동생 근상이 함께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는데 습작자까지 합치면 조선 귀족을 6명 배출한 집안이다. 이 때문에 일제 식민지 지배 당시에도 독립지사들은 이근택 5형제를 '5귀'라 부르며 지탄했다.

1910년 한·일병탄 뒤 일본 정부에서 훈1등 자작을 수여받은 이근택은 작위를 아들 창훈에게 습작했다. 창훈의 두 손자는 광복 후 교육 분야에 진출해 활약해왔다. 1998년 세상을 뜬 맏아들 이상우씨는 공주대 총장을 역임했고, 동생은 현재 공주대 물리학과 명예교수이다. 이근택의 형 이근호도 1910년 한·일병탄 조약 체결 공로로 남작 작위를 받아 매국형 친일파로 분류된다. 그의 후손은 2005년까지 선대의 친일 재산을 되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9건 낸 적도 있다.

교육계에 뿌리 내린 '자작 민영휘' 후손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작위를 받은 친일파 중 교육 분야에 뿌리를 내린 또 다른 집안으로는 '자작 민영휘' 후손을 꼽을 수 있다. 구한말 조선왕족이던 민영휘는 한·일병탄 직전 일제의 조선 병합을 지지하며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친일 매국 단체 간부로 이름을 올리고 활동했다. 그 공로로 병합 당시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매국공채 5만원을 받았다. 초기에 관직을 이용해 모은 재물을 불려 일제 강점기 조선 최대 갑부 반열에 올라섰다.귀족 출신으로는 드물게 대자본가로 변신한 민영휘는 일제하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분류된다.

민영휘의 후손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자리한 휘문고교를 상속받았다. 민영휘의 증손 민덕기씨는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풍문여고를 세웠다. 학교법인 휘문의숙은 민영휘의 증손자인 민인기씨가, 풍문학원은 고손자인 민경현씨가 각각 이사장을 맡았다. 현재 휘문고 교정에는 민영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다른 후손의 사회 진출도 화려한 편이다. 막내 아들의 장남인 민병도씨는 제일은행장과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민병도씨의 장남 민웅기씨는 텔레비전 드라마 < 겨울연가 > 촬영지로 유명한 강원도 춘천의 남이섬 유원지를 소유하고 있고, 둘째 아들도 기업체를 경영한다.

민영휘의 후손은 광복 뒤 이승만 정부에서 휘문의숙을 세운 공로로 표창을 받았다는 점을 들어 민영휘를 친일파로 분류하는 데 불만이다. 그러나 일제 때 조선총독부도 교육 관련 표창장을 줬다는 점에서 그의 교육사업 진출이 친일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지적을 받는다.

1907년 대한제국 군부대신을 지내다가 한·일신협약 체결로 군대 해산에 앞장선 이병무는 '정미칠적'으로 분류된다. 해산된 군대가 의병을 일으키자 강경 진압했던 이병무는 한·일병탄 때는 시종무관장으로서 병탄 조약 체결에 협조해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병무의 자작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은 이는 입양 아들 이홍묵이다. 이병무의 증손자 이진씨는 5공화국 때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노태우 정부 초기 국무총리 비서실장과 환경처 차관을 역임한 그는 현재 웅진그룹 환경경영담당 부회장이다. 그는 대학과 기업을 오가며 경제와 환경의 통합을 강조하는 '친환경 경영체제' 주창자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경술국적' 민병석 아들, 대법원장 지내
한·일병탄 조약 체결에 가담해 '경술국적'으로 불리는 민병석은 이완용과 처내종 간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을사늑약 이후 이토 히로부미와 깊은 교분 관계를 맺었던 민병석은 1909년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가 쓰러지자 장례 조문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한·일병탄 공로로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다섯 차례에 걸쳐 역임한 대표 친일파였다. 큰아들 홍기씨는 민병석의 자작 작위를 세습했고, 둘째 아들 복기씨는 일제 때 경성제대 법과를 나와 식민지 사법부에 진출했다. 민복기씨는 집안의 친일 행적과 상관없이 정부수립 후 제 5·6대 대법원장을 맡는 등 법조계의 거물로 활약하다가 지난해 작고했다.

민복기의 세 아들 중 일본 히도쓰바시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장남 민경성씨는 일본계 기업체 사장이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아버지의 뒤를 이은 둘째 민경택씨는 서울지법 판사, 서울지검 검사 등을 거쳐 변호사로 일하다 작고했다. 서울대와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을 나온 셋째 민경삼씨는 기업인이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전권대신으로 조인을 총괄했던 박제순은 1910년 내부대신을 맡아 한·일병탄 조약 체결에도 앞장섰다. 그 공로로 훈1등 자작 작위를 수여받고 중추원 고문이 됐다. 박제순의 아들 박부양은 중추원 서기관이 되었고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과 나란히 조선 귀족 모임인 동요회 이사를 지내면서 일제 강점기 내내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의 아들 박승유씨는 서울대 음대와 미국 남가주 대학 음대를 졸업한 뒤 성악가로서 강원대 음대 교수를 역임했다.

조선 왕족의 종친 가운데도 구한말 귀족 작위를 받고 식민지 지배에 적극 협력한 사람이 있다. 이해승이 그런 경우다. 이해승은 한·일병탄 후 21세에 후작 작위와 매국공채 16만2000원을 받았다. 종친 가운데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낸 이기용과 함께 태평양 전쟁을 미화하는 등 적극 친일에 나선 이해승은 광복 후 반민특위에 끌려갔지만 이승만 정부가 반민특위를 해체하면서 풀려났다. 그는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이해승의 손자 이우영씨는 현재 서울 홍은동에 있는 그랜드 힐튼 서울호텔 회장 겸 동원 INC 회장이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지난해 이해승이 친일 대가로 경기도 포천에 조성한 토지 약 200만㎡(시가 300억원대)를 국가 귀속하기로 결정했다.

매국 조약 체결에 앞장선 친일파 후손 가운데는 멸문한 집안도 있다. 대한제국 법무형사국장으로서 명성황후 폐비 조처를 주도해 시해 사건을 돕고 10년간 일본으로 망명한 조중응이 그런 경우다. 일본에서 돌아와 이완용 내각 농상공부대신으로 한·일병탄에 앞장선 조중응은 그 공로로 자작 작위와 은사금 10만원을 받았다. 이후 중추원 고문을 맡아 친일에 앞장선 조중응은 정실부인을 서울에 두고도 일본 여성과 도쿄에서 따로 결혼해 슬하에 자녀를 뒀다. 자식이 없던 서울의 정실부인은 양자를 입적했지만 대가 끊겼고, 대신 일본 부인과 자녀가 조중응 사후 작위와 재산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러면 매국형 친일파 중 당대에 쌍벽을 이루며 나라를 팔아넘기는 데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는 이완용과 송병준의 후손은 어떻게 지낼까.

구한말 내각총리대신으로 한·일병탄에 앞장선 매국노의 상징 이완용은 병탄 후 중추원 고문으로 백작 작위와 은사금 15만원을 받았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 "일선 동화의 결실을 손상하는 경거망동과 황당무계한 유언 선동을 중지하라"고 만세운동 비난 담화를 발표해 그 공로로 1920년 후작으로 승작했다. 1926년 이완용이 사망한 후 귀족 작위와 재산은 손자 병길이 습작했다.

이병길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이완용의 직계 종손인 이윤형씨가 상속권자다. 일제 때 일본인 고위 관료 자녀의 교육기관이던 경성제1사범대 부속학교를 거쳐 동성고교와 홍익대를 나온 그는 광복 뒤 한동안 숨어 지내다가 1960년대 말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의 발탁으로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을 지냈다. 그 뒤 17년간 캐나다에서 살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국내에 들어와 이완용 땅찾기 소송에 뛰어들어 한때 승소 판결로 수십억원을 챙기기도 했다.

한편 이완용의 셋째 손자(이병길의 동생)인 이병주씨는 1962년 9월21일 일본으로 밀항해 들어가 일본 정부에 생활 보장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그를 귀화시키고 환대했다. 일본에 귀화한 이병주의 아들 이석형씨는 1979년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뒷산에 있던 이완용 부부의 묘를 파내 화장해버렸다. 이완용의 관 뚜껑에는 일왕이 부여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위대훈위 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阮 副議長 二位大勳位 牛峯李公之柩)'라 쓰여 있었다. 작업하던 인부가 이 관 뚜껑을 인근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전달해 한동안 역사 자료로 소장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있던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이 소식을 듣고 내려와 원광대 총장을 설득해 가져다 태워버린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친일 사학자라고 비판받던 고 이병도 박사는 이완용과 우봉 이씨 집안 친척이다. 고 이병도씨의 두 아들이 현재 서울대학교 이장무 총장과 이건무 문화재청장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씨의 오랜 땅찾기 작업은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조사와 국가 귀속 조처로 현재는 주춤한 상태다.

송병준 후손, 집요하게 '땅 찾기' 나서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던 매국노 송병준은 구한말 농상공부대신과 내부대신을 역임하며 한·일병탄 때는 친일 매국단체 일진회 총재 자격으로 병탄에 앞장선 인물이다.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왕실재산조사위원장을 맡아 전국 각지의 토지대장 수천만 평에 자기 이름 석 자를 세겨넣은 송병준은 1925년 뇌일혈로 숨졌는데, 재산과 작위는 아들 송종헌이 물려받았다. 송종헌 역시 중추원 참의를 지내면서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전국적 세도가로 행세했다.

그의 아들 송재구는 일본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뒤 1930년 홋카이도에서 '조선목장' 약 2640만㎡를 경영했다. 광복 후 송종헌은 용인군 내사면 추계리 99칸짜리 저택과 전답을 긴급 처분한 뒤 서울로 피신했으나 반민특위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49년 뇌일혈로 사망했다.

송재구의 아들이 바로 송돈호씨로 서울 역삼동에서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서울·인천·경기·강원 등지에 걸쳐 있는 송병준 명의 토지 상속소송을 주도하며 각종 사기 사건을 일으키다가 2007년 4월 구속됐다. 올해 초 보석으로 나온 송돈호씨는 최근 헌법재판소에 친일재산 특별법 위헌소송을 냈다가 기각당하는 등 여전히 송병준 땅 찾기에 집요하다.

친일 대가로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은사금, 은사 토지를 받은 매국형 친일파 후손보다 광복 후 사회·경제적으로 더 강고한 기득권을 구축한 친일파 후손이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던 그룹이 그들이다. 요즘으로 치면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중추원 참의는 1910년 한·일병탄 직후부터 임명되기 시작해 광복 때까지 70여 명이 거쳐갔다. 1910년 10월 초대 참의 임명자는 종신직이었지만 1921년부터는 3년 임기로 일제 식민지배 공헌도에 따라 돌아가며 역임했다. 오랜 친일 행적이 쌓여 공로를 인정받아야 참의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역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친일파로 분류된다.

호남 지방의 대지주였던 김연수는 일제 때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경성방직을 경영했다. 친일 기업인으로 활동한 그는 1935년 총독부가 발간한 < 조선공로자명감 > 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경성방직 사장 직함과 함께 수록돼 있다. 1940년 중추원 참의를 맡은 김연수는 태평양 전쟁 때 거액의 국방헌금을 기부하면서 군수산업에 뛰어들었다. 이 기간 중 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임전보국단·국민의용대 등 친일 단체 간부로서 각지를 돌며 학병 지원 연설을 많이 벌였다. 광복 뒤 반민특위에 체포됐다가 특위가 해체되면서 풀려난 김연수는 1961년 전경련의 전신인 전국경제협의회장을 맡는 등 재계 원로로 행세했다.

김연수는 7남6녀를 두었는데 장남 고 김상준은 삼양염업 명예회장, 차남 고 김상협은 16대 국무총리를 지내고 작고했다. 3남 김상홍은 현 삼양사 명예회장, 5남 김상하는 삼양사 회장을 맡고 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같은 신체시로 이름을 알린 육당 최남선도 중추원 참의 출신이다. 3·1운동 때 문화계 대표로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최남선은 그 후 변절해 일제 식민사관을 유포하던 어용단체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고,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최남선 역시 광복 뒤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처벌은 면했다.

최남선의 장남 최한웅 교수는 서울대 의대 소아감염학 권위자로 이름을 날렸다. 최남선의 맏손자는 피부과 전문의이고, 또다른 손자는 경기대 경영학부 교수로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사업가로 명성을 떨친 문명기도 참의 출신 친일파로 분류된다. 제지업과 수산업, 금광 개발에 뛰어들어 부를 쌓은 그는 태평양 전쟁 때 국방헌금을 냈다. 아울러 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조직해 비행기 헌납운동을 벌이며 가미카제 특공대를 옹호하는 친일 활동을 폈다. 또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 함대를 물리치기 위한 일제 해군 '헌함운동'도 벌이며 앞장서 자기의 광산을 일제에 기부했다. 이런 공로로 1941년 중추원 참의가 됐다.

그의 맏손자인 문태준은 서울대 의대와 미국 토머스제퍼슨 대학원을 수료한 뒤 7대부터 10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현재 남평 문씨 대종회장이다.

'친일 내력' 노출되는 정치권 진입 적어
정치인 가운데도 일제 시대 중추원 참의를 선조로 둔 이가 있다. 강릉 갑부로서 1936년 중추원 주임참의에 임명된 후 1941년 연임한 최준집의 아들 최돈웅 전 의원이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자기 회갑연을 취소하고 국방헌금으로 1000원을 납부한 사실이 매일신보에 보도될 정도로 일제에 충성했다. 그의 아들 최돈웅씨는 8·14·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2년 대선 때는 이회창 후보의 대기업 상대 불법 선거자금을 거둔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특사로 풀려났다.

재계의 거물 중 선대가 중추원 참의인 경우도 있다. 호남의 대표 친일 부호로서 1930년 중추원 참의가 된 현준호의 후손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다. 1920년 호남은행을 설립해 대표를 지낸 현준호는 한때 민립대학 설립 등 민족교육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1930년 중추원 참의가 되고부터 지역 간척사업 이권을 따내는 등 일제와 밀착 행보를 보이며 민족운동과 결별했다.

현준호 역시 1935년 총독부 편찬 공로자 명단에도 올랐다. 중·일전쟁 발발 후 총독부가 조직한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나서 전쟁 지원을 역설했던 그는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징병제 홍보와 학병 지원 권유 등에 적극 가담했다.

현준호는 한국전쟁 시기에 북한군에 피살됐다. 현준호의 후손은 대개 재계로 진출했다. 현우실업 대표인 현양래는 현준호의 손자이다. 현주호의 아들 고 현영원씨는 현대상선 회장을 지냈다. 현영원씨는 딸 넷을 두었는데 둘째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다. 현 회장은 1955년생으로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1976년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과 결혼해 현대가와 혼맥으로 연결됐다.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은 현정은 회장의 어머니인 김문희씨의 동생이라서 두 사람은 외삼촌과 조카 사이이기도 하다.

친일파 후손의 사회 진출에서 특징은 학계·경제계·관료·문화예술 분야에 몸담은 이가 많다는 점이다. 정치 분야 진출도 없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그 수는 적었다. 이는 후손이 선거운동 등에서 자기의 집안 내력이 노출되는 정치권 진출을 꺼렸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이들 대표적인 친일파 후손이 현재 사회·경제적으로 '잘나간다'고 해서 무턱대고 조상의 친일 '덕분'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 일제의 악랄한 탄압에 가산을 탕진하고 온갖 고초를 겪었던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에 비해 친일파 후손은 선대가 만들어준 '요람'에서 근대적 교육 기회를 충분히 누리거나 유산 상속 등으로 출발부터 남달랐다. 비교적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친일파 후손까지도 경제 형편은 유복한 편이었다. 아직도 조상이 친일 대가로 조성해둔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국가기관을 상대로 법정 다툼을 벌이는 경우도 많다. 광복 63주년을 맞아 민족정기 확립을 위한 국민의 관심이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희상 기자·이재덕 인턴 기자 /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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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현지 시간) 중국 쓰촨성 쑤이닝시 수영장에 더위를 식히기 위해 몰려든 인파. 지역 언론에 따르면 이날 온도가 37℃에 달했다. ⓒ로이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http://news.naver.com/hotissue/ranking_read.php?ranking_type=popular_day&date=2008-07-28&section_id=003&office_id=045&article_id=0001950353&seq=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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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에 막힌 세종로사거리



컨테이너박스 등장, 서울광장 곳곳 `어수선'

(서울=연합뉴스) 신재우 기자 = 대규모 도심 촛불시위를 앞둔 10일 서울 광화문 일대는 오전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경찰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에 10만∼15만명(주최측 추산 30만∼50만명)의 기록적인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이날 새벽부터 세종로 양방향 차로에 컨테이너박스를 2층으로 쌓아올려 저지선을 구축했다.

경찰은 출근길 차량 소통을 위해 양방향 2개 차로씩만 뚫어놔 이 일대는 갑자기 줄어 든 도로로 인해 극심한 정체 현상이 빚어졌다.

특히 시청에서 경복궁 방면 도로에는 차량들이 꼬리를 물었으며 이 때문에 운전자들과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던 시민들의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교보빌딩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시민 이경희(55.여)씨는 "정부가 시위대를 막기 위해 컨테이너박스까지 동원한다는 게 과연 이성적이냐"며 "이런 모습을 외국인이 촬영하면 국제적으로도 창피한 일이다"고 말했다.

경찰은 시위대의 컨테이너박스 돌파를 막기 위해 새벽부터 컨테이너박스 사이의 틈을 잇는 용접 공사를 벌였으며 이로 인해 생긴 굉음 때문에 인근 사무실 회사원들과 행인들의 시선이 모두 작업현장으로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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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에 막힌 세종로사거리


회사원 정오진(42)씨는 "막으려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심정"이라며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저항심이 생기는데 컨테이너박스 작전은 아직도 정부가 국민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화를 냈다.

이날 집회 장소인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은 하루종일 각종 단체들의 집회가 예정돼 있어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뉴라이트전국연합, 선진화국민회의, 국민행동본부 등 보수단체 사람들이 오전부터 행사준비를 위해 무대설치를 시작하자 몇몇 시민들은 "끝까지 시청을 사수해야 한다" "이명박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시민 30여명은 행인들에게 오후에 진행될 보수성향 단체들의 `맞불 집회'를 비난하는 선전전을 펼치기도 했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관계자는 "오늘 수십만명의 시위대가 서울시청을 점거해서 뉴라이트의 집회를 막는 방법도 있겠지만 물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낮 시간동안 다양한 공간에서 집회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withwit@yna.co.kr


출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2&sid2=257&oid=001&aid=000212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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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는 유시민이 필요하다.

요즘 이른바 ‘대통합 논의’의 장막 뒤에서 유시민 의원의 거취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는 모양이다. 요컨대, 익명의 그늘에 숨어서 “유시민이 끼면 대통합이 안 된다”라든가, “유시민은 대선후보경선에 못 나오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명색이 大통합을 하자면서 특정인에 대한 배제를 운운하는 것은 명분 없는 짓이다. 특히 피선거권에 아무런 결격사유가 없는 개인의 정치적 선택을 두고 왈가왈부하면서 “불출마 선언을 전제로 대통합에 끼워주겠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금도를 넘는 행패이다. 또한 몇몇 정치인들이 “대통령의 뜻”을 운운하면서 유시민 의원을 압박하는 것도 온당치 못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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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은 불온하다.


어쨌든 우리 정치권 안에 유시민 의원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이 상당수 존재하는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다. 속칭 ‘왕따’라고도 하고 흔히 ‘이지메’라는 일본어로도 표현되는 집단따돌림 현상은 “집단의 구성원 중 약한 상대 또는 집단의 암묵적인 규칙을 어긴 자를 집단 속에서 소외시키고 인격적으로 무시 혹은 공격하는 언어적, 신체적인 일체의 행위”로 정의된다.


내 생각으로는 유시민 의원에 대한 집단따돌림은 그가 ‘약한 상대’이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상당수의 정치인들이 그가 가진 잠재력(정치적 의제 설정능력, 열광적인 지지자 그룹 등)을 시샘하거나 두려워했으면 했지, 결코 그를 만만한 상대로 여기지는 않을 터이다. 따라서 아마도 그에 대한 집단따돌림은 그가 ‘집단의 암묵적인 규칙을 어긴 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부터 유시민은 불온하기 짝이 없었다. 지난 2003년 면바지와 캐주얼 재킷 차림으로 ‘신성한’ 국회의 권위를 모독하면서 등장한 이래로, 그는 끊임없이 정치권의 권위주의와 비정상적인 관행들과 위선을 상대로 발칙한 도발을 자행해왔다.


그래서 나는 유시민 의원이 정치권이라는 집단의 암묵적인 규칙을 ‘어긴 자’일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어길 혐의가 있는 자’이며, 그것이 그에 대한 집단따돌림의 근본적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좋은 게 나쁜 거다!


불온하다는 것 말고도 그가 어긴 ‘암묵적인 규칙’이 또 하나 있다. 어쩌면 가장 결정적인 것인데, 바로 ‘침묵의 카르텔’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권의 부정직한 관행들과 음습한 비밀들을 ‘좋은 게 좋은 거다’는 식으로 못 본 척 넘어가지 않았다.


어느 집단이든지 자기들끼리만 알고 넘어가고 싶은 일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을 발설한 ‘내부고발자’에 대한 시선이 고울 리 없다. 특히나 예로부터 ‘체면’과 ‘의리’를 숭상해온 우리사회에서는 ‘침묵의 동맹’을 깨뜨린 내부고발자에 대해서 결코 자비롭지 않다.


정치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유시민 의원은 대충 덮고 넘어가야 할 정치권 내부의 일을 국민이나 당원들에게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는 못 믿을 자이다.


제왕적인 보스와 검은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정당, 당비 내는 당원이 주인으로 참여하는 정당을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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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기로 약속해놓고 창당선언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정치인들끼리 모여 앉아서 당원의 권리를 다시 거둬들일 궁리를 하는 것을, 당원들 앞에 폭로하며 궐기를 선동한 자가 유시민이다.


한마디로 ‘동업자의식’이나 ‘공범의식’이 전혀 없는 그를 어느 정치인인들 미워하지 않겠는가?


어느 후배 정치인이 그를 두고 “옳은 말을 싸가지 없이 한다”고 했던 것도 아마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 충언을 했던 후배는 “옳은 말”은 간 데 없고 “싸가지 없다”만 회자되면서 두고두고 주홍글씨로 남는 정치권의 생리까지는 미처 고려하지 못했으리라.)


현장부재증명(알리바이)


요즘 들어 ‘유시민 왕따’의 새로운 (그리고 절박한)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자신들은 참여정부와 관계없다는 ‘현장부재증명’, 즉 알리바이다.


참여정부와 집권여당에 참여했던 이들 중에서도 패배주의에 빠져 스스로 “국정실패”를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민주개혁세력의 집권 기간이 “잃어버린 10년”이 아닌 ‘되찾고 바로세운 10년’이었노라고 당당하게 나서기를 포기하고, 자신들이 참여정부와 관련 없음을 호소하며 국민들에게 면책을 신청하기 바쁘다.


“국민여러분께서는 노무현 대통령을 싫어하시고, 유시민은 ‘노의 남자’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진작부터 참여정부와 갈라섰고 이번에 ‘대통합’하면서 유시민은 안 끼워 줄 겁니다. 그러니 제발 우리까지 미워하지는 말아 주세요.”  이렇게 말하고 싶은 거다.


바로 그래서 그들에게는 유시민이 필요하다.

대신 남아서 돌팔매를 고스란히 맞아줄 속죄양으로서.


그런데 장관직을 마치고 돌아온 유시민 의원이 ‘철이 들어서’ 예전처럼 혈기 왕성하게 대들지 않으니 그들은 은근히 불안하다. 혼자서 열린우리당을 끌어안고 옥쇄해주면 딱 좋겠는데, ‘대통합’에 합류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드는 모양이다. 그래서 또 다시 왕따와 발길질이 시작되었다.


“우리끼리 갈 테니 넌 좀 빠져. 그래야 우리가 살아!”


이른바 ‘배제론’이다. 그들에게 유시민 의원은 ‘배제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이다!



이광철 /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이광철 의원이 7월 13일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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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게 나쁜거다... 라는 말이 와 닿는다.
초등학교 때 우리반 아이가 선생님에게 "좋은게 좋은거쟎아요~" 라고 말했다가
엄청나게 혼나는걸 보고 그게 그렇게 심한 말인가 생각했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어린아이가 가져서는 안되는 정말 순수하지 못한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노발대발 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그 때 그 선생님은 지금 뭐하고 계실까?...
전화해볼 용기는 안난다. ㅡㅡ;;
Posted by hj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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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과세 펀드

2007. 1. 22. 17:14
출처 :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S2D&office_id=018&article_id=0000449626§ion_id=101§ion_id2=259&menu_id=101

Posted by hj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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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

2006. 9. 16. 00:35
역시 조중동...

Posted by hj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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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j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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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중형승용차 한대 값에 달하는, 전세계 300대밖에 존재하지 않는 명품 ‘헤드폰’이 있다.명품오디오기기만 제작하는 독일기업 ‘젠하이져’(www.sennheiser.com)에서 개발한 1,700만원짜리 명품헤드폰, ‘오르페우스(Orpheus)’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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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품은 얇은 금박이 입혀진 폴리머 포일, 고강도 유리, 금(金)플레이트, 비취우드 등 최고급 소재만으로 제작해 중후한 외관부터 성능까지의 가치를 극대화시켰으며 사용자의 프라이버시까지 고려해 전용열쇠가 있어야만 온/오프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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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형 다이어프램구조의 헤드폰(HE90)과 진공관방식의 앰프(HEV90)로 구성돼 있고 D/A컨버터를 탑재한 진공관 앰프를 장착해 높은 직진성과 부드러운 음색을 구현하도록 했으며, CD플레이어, 셋톱박스, DVD플레이어 등 다양한 디지털 기기들과 호환이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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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Orpheus)’는 300대만 한정생산해 판매하며 현재 국내에는 일련번호 ‘299’가 찍힌 단 한대만 전문점에 진열돼 있다. 하이엔드 오디오제품만 취급하고 있는 ‘희윤전자’(대표 박희윤)가 그 제품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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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j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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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시민 열린우리당 의원(왼쪽)의 <조선>·<동아>에 대한 '독극물' 발언에 대해 <동아일보>는 20일 사설을 통해 반격에 나섰다.

"법적으로 보장된 권한을 법무부장관이 행사한 것을 마치 우리 정부와 대통령, 여당이 사상적으로 이상하다고 선동 보도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독극물과 같다."(유시민 열린우리당 의원)

"다수의 국민을 모독하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말대로라면 발행부수 600만부를 오르내리는 세 신문의 애독자들은 매일 독극물을 마시고 불량식품을 먹고 있는 셈이다."(<동아일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향한 '독극물' 발언이 유시민 열린우리당 의원과 <동아>간 2라운드 논쟁으로 이어질 조짐이다.

유 의원이 지난 17일 당 상임중앙위원회의에서 강정구 동국대 교수에 대한 <조선>와 <동아>의 최근 보도를 문제 삼으며 '독극물'이라는 비난한 데 이어 19일에는 <중앙일보>를 향해 '불량식품'이라는 독설을 퍼부었다.

<동아>는 이에 20일 사설에서 유 의원을 지목해 "권력 맛에 취한 젊은 의원의 독선과 오만방자함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고 반격에 나섰다.

<동아일보> "칼럼 집필 거부하자 석달 뒤 '절독기' 기고"

<동아>는 이날 사설에서 '유시민 의원의 과거행적이 떠오르는 이유'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최고 권력을 쥔 대통령 편에 서서 대한민국의 역사, 제도, 문화를 칼질하고 85년 전통의 신문을 향해 모진 공격을 퍼붓는 유 의원같은 사람들은 '5년 정권'이 영원할 줄 알고 있는 것일까"라며 "어떤 정권도 무대에서 내려오고 나면 역사의 평가 앞에 알몸으로 서게 되는 법"이라고 경고했다.

<동아>는 또 '유 의원이 <동아>에 등을 돌리게 된 계기'를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유 의원과 <동아>의 '오랜 인연'은 지난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본보에 1년 3개월간 칼럼을 쓰다가 TV 시사토론 진행을 맡게 되자 2000년 6월 집필을 중단했다. 그리고 2002년 1월 방송 진행을 그만두게 되자 다시 본보에 칼럼이나 기획연재를 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지만 본보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고 석 달 뒤 그는 한 잡지에 '나의 동아일보 절독기'를 발표했다. 그는 '칼럼을 실어주지 않는다고 열받아서 동아일보를 욕한다는 오해만큼은 피하고 싶다'고 했지만 본보가 칼럼 집필을 수용했어도 절독기를 썼겠는지 스스로 되물어 볼 일이다."


유시민 "독자와의 약속 지키기 위했던 것"

이에 대해 유 의원은 이날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개인의 견해(독극물 발언)를 자유롭게 표명했을 뿐인데, 수백만부 발행 부수를 무기로 삼아 (<동아> 애독자들은 언급하며) 이렇게 협박하는 이런 행태야말로 조폭들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유 의원은 또한 <동아>의 의혹 제기에 대해 "2000년 6월 <동아> 기고를 그만두면서 '다시 돌아오면 제일 먼저 인사드리겠다'고 독자와 약속했기 때문에 방송을 그만 두면서 외부 필진 관리팀에 이메일을 보냈다"며 "독자들에 대한 도리를 다 하기 위함이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유 의원은 지난 2000년 6월 28일 <동아>의 고정코너 '유시민의 세상읽기' 마지막 칼럼에서 "제 칼럼이 사라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아쉬워하시는 분이 있다면 저로서는 큰 영광"이라며 "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지 모를 '외도'(TV 토론 진행자)를 끝내고 본업인 글쓰기로 돌아오면, 제일 먼저 그 분들께 인사를 드릴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유 의원은 또 이 글에서 <동아>와의 각별한 인연을 소개했다.

"하필 왜 <동아일보>냐는 문제는 사연이 좀 깊습니다. 제가 글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게 된 것은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던 1985년 봄 재판부에 제출했던 '항소이유서'가 '지하 베스트셀러'가 된 우연한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항소이유서'를 단독보도해서 특종 비슷한 기사로 만들어 낸 신문이 바로 <동아일보>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동아일보는 '글쟁이 유시민'에 대해 일종의 '지적 소유권(?)'을 보유한 셈입니다.

98년 1월 졸지에 'IMF 귀국 유학생'이 되어 공부를 중단하고 독일에서 돌아왔을 때, 말할 수 없이 곤궁한 처지에 있던 저에게 아낌없이 지면을 허락하여 준 것도 <주간동아>와 월간지 <신동아>였으며 '유시민의 세상읽기' 연재 역시 그 연장선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유 의원이 바라보는 <동아>는 '글쟁이 유시민의 지적 소유권자'에서 '독극물'로 극명한 변화를 보인 셈이다.

'글쟁이 유시민의 지적 소유권자'던 <동아>가 '독극물' 된 이유

유 의원은 이에 대해 "<동아>에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개인적인 마음이고, 절독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공적인 행위"라며 "아무리 고맙게 생각하는 면이 있더라도, <동아>의 잘못을 눈감고 지나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유 의원은 "옛날 <동아>와 지금 <동아>는 다르다"며 "80년대 <동아>에는 기자들이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정신을 갖고 있었고 민주주의에 대한 칼럼진들의 절절한 욕망이 느껴졌지만, 2002년 언론의 자유가 열린 이후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동아>가 이번 사설에서 언급한대로 유 의원은 2002년 <인물과 사상> 4월호에 기고한 '나의 동아일보 절독기'에서 <동아>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바 있다.

당시 유 의원은 "구독을 중단하기로 한 직접적인 계기는 9·11 테러 이후 <동아>가 보여준 대북정책 관련 보도들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부시의 '악의 축' 발언으로 북미간의 긴장이 높아지고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이 고려되는 상황에서 <동아>가 사설과 해설기사, 노재봉씨 등 외부필진 칼럼을 통해서 보여준 것은 햇볕정책에 대한 비아냥, 김대중 정부 외교정책이 곤경에 빠진 것을 즐거워하는 듯한 무책임한 논평이 거의 전부였다"고 꼬집었다.

오마이뉴스 이민정(wieimmer98)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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