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종수 기자 = 연말정산은 봉급생활자들에게 매년 반복되는 '자기권리 찾기'지만 막상 닥칠 때마다 전년에 비해 조금씩 달라진 내용 때문에 애를 먹게 마련이다.

올해는 연말정산 증빙제출과 과다납부 세금을 돌려받는 시기부터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신용카드 등 의 사용액 공제도 일부 바뀌어 좀 더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요 내용을 문답형식으로 정리한다.

-- 올해부터 신용카드와 의료비 사용공제의 대상 시기가 달라진다는데.

▲연말정산 서류 제출시기가 이듬해 1월로 달라지면서 신용카드 등 소득공제(신용카드,현금영수증,학원비 지로납부액 등)도 여기에 맞춰 1∼12월이 됐다.

지금까지 전년 12월∼올해 11월이었던 것을 맞추다보니 올해만 지난해 12월∼올해 12월의 13개월치를 공제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용카드 사용액 공제의 대상도 지난해까지는 총급여액의 15%를 초과한 부분에 대해 사용액의 15%까지였지만 올해부터는 총급여액의 20%를 초과한 부분에 대해 사용액의 20%까지로 달라진다.

의료비 공제도 신용카드와 마찬가지로 올해는 지난해 12월∼올해 12월분이다.

의료비 공제한도는 본인이나 장애인,경로우대자인 경우 총급여의 3%를 넘는 사용액 전액이, 그외에는 총급여의 3%를 넘는 범위에서 500만원까지다.

의료비 공제대상에는 병원비 외에 약제비, 안경(50만원 한도), 보청기, 장애인 보장구 등이 포함된다.

-- 의료비와 신용카드 사용액 중복공제 허용문제는 어떻게 됐나.

▲지난해에는 카드로 지출된 의료비에 대해 중복공제를 허용하지 않았으나 정부가 이 문제를 올해분부터 다시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중복 확인에 드는 비용에 비해 세수 증대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 교육비 공제가 좀 더 확대됐다는데 내용과 전체 한도액은.

▲지난해까지는 초,중,고등학생 자녀 교육비 공제 대상항목이 입학금,수업료,육성회비 등 공납금만이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학교 급식비와 학교에서 구입한 교과서 대금, 방과후 학교 수업료까지 인정된다.

교육비의 공제한도는 본인의 경우 전액, 취학전 아동과 초.중.고등학생은 200만원, 대학생은 700만원까지다.

-- 기부금 공제의 대상은 어떻게 달라졌나.

▲지정기부금의 경우 공제한도가 지난해까지 소득금액의 10%에서 올해부터 15%로 늘어나고 본인 외에 소득금액 100만원 이하 배우자나 직계비속이 기부한 부분까지 포함된다. 기부문화 활성화를 위한 정책적 고려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교회나 절 등 종교단체에 대한 지정기부금은 현행대로 소득금액의 10%까지다.

-- 출산이나 장애인 가족에 대해 공제를 통한 지원이 늘어났다는데.

▲올해부터 출산뿐 아니라 입양에 대해서도 출산,입양이 이뤄진 당해 연도에 1인당 연 200만원을 추가로 소득공제 해준다.

또 고용지원센터로부터 받는 육아 휴직급여 및 산전,산후 휴가급여, 출산보육수당 10만원에 대해서는 비과세된다.

장애인인 직계비속의 배우자가 장애인인 경우 기본공제 대상자에 추가된다는 점도 알아둬야 한다.

예를 들면 근로자의 아들이 장애인인데 며느리도 장애인이라면 며느리에 대해 기본공제, 장애인공제, 장애인 전용 보장성 보험의 보험료 공제 등을 모두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 연말공제 대상이 되는 금융상품은 어떤 게 있고 한도는.

▲우선 보장성 보험의 보험료 공제한도는 100만원이다. 또 개인연금저축(불입액의 40%)은 72만원까지, 퇴직연금과 연금저축은 각각 300만원까지다. 우리사주조합 출연금은 400만원까지 인정된다.

올해부터 신설된 장기 주식형 펀드 소득공제도 자신이 대상인지 등을 잘 살펴야 한다.

지난 10월19일부터 펀드자산의 60% 이상을 국내 주식에 투자하는 주식형 펀드에 3년 이상 적립식으로 가입하면 가입 1년차에 불입액의 20%, 2년차에는 10%, 3년차에는 5%씩이 공제된다. 가입한도는 분기별로 300만원, 연간 1천200만원이다.

jski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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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2월 중순 이후부터 시작되는 연말정산 시즌이 다가온 가운데, '13번째 월급'을 챙기기 위해서는 챙겨야 할 사항이 한 두 개가 아니다.

특히 세법은 매년 개정되기 때문에 올해 연말정산에서달라지는 내용도 꼼꼼히 체크해봐야 한다.

1일 국세청에 따르면 올해는 근로자의 연말정산 시기가 1개월 연장돼 1월이 아닌 2월 월급이 지급될 때 연말정산 '보너스'를 받을 수 있으며, 올해 초부터 시행된 소득세 과표구간 조정 및 각종 공제확대 정책으로 인해 혜택이 더 늘어났다.

의료비와 신용카드 등 사용금액은 2007년 12월 1일부터 2008년 12월 31일까지 공제돼 13개월분의 공제혜택을 받을 수 있다.

신용카드 사용액은 총급여액의 15% 초과분에 대해 15%까지 공제됐지만, 올해부터 20% 초과분의 20%까지로 늘어나고, 지정기부금 공제한도도 근로소득금액의 10%에서 15%로 확대됐다.

교육비 공제대상에 학교급식비, 학교에서 구입한 교과서대 및 방과후 학교 수업료 등이 새로 포함됐고, 자녀의 출산이나 입양에 대해 1인당 연 200만원의 추가 소득공제도 받을 수 있게 됐다.

올해부터 달라지는 11개 연말정산 항목에 대해 정리해봤다.

□ 연말정산 시기 1개월 연장

국세청은 근로자들이 연말정산에 필요한 각종 소득공제 영수증을 내년 1월말(2월초)까지 제출할 수 있도록 원천징수의무자(회사)에 안내했다. 이는 세법개정으로 올해부터 연말정산 시기가 1월분 급여 지급시에서 2월분 급여 지급시로 1개월 연장된 것에 따른 것. 원천징수의무자는 지급명세서 제출을 포함한 연말정산 결과를 3월 10일까지 신고·납부하게 된다.

□ 종합소득세 과표구간 조정으로 근로자 세부담 경감

세율 8%가 적용되는 과세표준이 '1000만원 이하'→'1200만원 이하'로, 17%가 적용되는 과세표준은 '1000만원 초과~4000만원 이하'에서 '1200만원 초과~4600만원 이하'로, 세율 26% 적용 과세표준은 '4000만원 초과~8000만원 이하'에서 '4600만원 초과~8800만원 이하'로, 세율 35%적용 과세표준은 '8000만원 초과'에서 '8800만원 초과'로 각각 인상됐다.

□ 올해 의료비와 신용카드 등 사용금액은 13개월 분 공제가능

모든 특별공제 대상기간이 당해연도 사용분으로 조정됨에 따라 의료비와 신용카드 등 사용금액은 올해에는 2007년 12월 1일에서 2008년 12월 31일까지 지출(사용)분으로 13개월분이 소득공제 대상이 된다. 지난해 연말정산에서는 2006년 12월부터 2007년 11월까지로 12개월분이 적용됐었다.

□ 교육비 공제대상 확대

지난해까지 초·중·고등학교 자녀 교육비는 입학금, 수업료, 육성회비 등 공납금만 대상이었으나, 올해부터는 학교급식비, 학교에서 구입한 교과서대 및 방과후 학교 수업료(교재비 제외)가 교육비 공제대상에 포함됐다.

□ 기부금 공제 확대

기부문화 활성화를 위해 개인 2008년부터 지정기부금의 공제한도가 소득금액의 10%에서 15%로 확대됐다. 다만 종교단체에 대한 지정기부금은 현행 10%로 유지된다. 또한 기부금 공제가 지난해까지는 본인이 기부한 금액만 공제됐으나, 올해부터 근로자의 배우자(소득금액
100만원 이하)나 직계비속(기본공제대상자)이 기부한 금액도 공제대상이 된다.

□ 신용카드 등 사용금액 계산방법 변경

2008년부터 신용카드 등 사용금액이 총급여액의 20%를 초과하는 경우 그 초과금액의 20%를 공제하는 것으로 변경됐다. 다만 공제 한도금액은 총급여의 20%와 500만원 중 적은 금액으로 지난해와 동일하다. 지난해에는 총급여액의 15% 초과분의 15%를 공제했었다.

□ 출산·입양시 추가공제 신설

올해부터 근로자들의 자녀 출산비용 및 양육 준비비용, 자녀 입양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출산·입양시 추가공제가 신설됐다. 자녀의 출산과 입양시 출생·입양한 당해 연도에 1인당 연 200만원을 추가로 소득공제 받을 수 있다. 또한 고용지원센터로부터 받는 육아휴직급여 및 산전·후휴가급여와 출산보육수당 10만원에 대해 비과세된다. 올해 자녀를 출산하였으나 출생신고를 하지 못했더라도 2월 급여를 받을 때까지 출생 신고 후 주민등록등본을 제출하면 기본공제 100만원, 자녀양육비공제 100만원 및 출산·입양자 공제 200만원을 모두 공제 받을 수 있다.

□ 장애인 가족에 대한 세제지원을 강화

올해부터 장애인인 직계비속의 배우자가 장애인인 경우 기본공제대상자에 추가됐다. 실례로 근로자의 아들이 장애인이고 며느리도 장애인인 경우 며느리에 대하여 기본공제, 장애인공제, 장애인전용보장성보험의 보험료공제 등을 모두 받을 수 있다.

□ 노인장기요양보험료에 대한 소득공제 신설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국민건강보험, 고용보험료와 같이 근로자가 부담하는 노인장기요양보험료도 전액 공제되는 보험료에 추가됐으며, 장기요양급여 비용 중 실제 지출한 '본인 일부 부담금'이 의료비 소득공제 대상에 추가됐다.

□ 주택자금공제 공제요건 보완

주택마련저축의 소득공제 요건은 무주택자이거나 국민주택규모 이하 1주택(가입당시 기준시가 3억원 이하)을 소유한 세대주로 가입당시 소유주택의 기준시가를 알 수 없는 경우 확인 가능한 최초시점에 3억원 이하이면 소득공제가 가능하다. 과세기간 종료일 현재 1주택자이고 연도 중 2주택 보유기간이 3개월 이하인 경우 장기주택저당차입금 이자상환액 소득공제가 허용된다. 모기지론 설정당시 기준시가를 확인할 수 없는 주택을 취득하는 경우 기준시가를 확인 가능한 최초 시점에 3억원 이하의 주택이면 소득공제가 가능하다. 주택마련저축을 가입한 당해 저축기관에서 주택마련저축과 연계하여 대출받은 차입금에 대해서만 임차차입금 원리금상환액 소득공제를 받을 수 있던 것을 올해부터 주택마련저축 가입 저축기관과의 연계 규정이 삭제됐다.

□ 장기주식형펀드 소득공제 신설

2008년 10. 19일부터 펀드자산의 60% 이상을 국내주식에 투자하는 주식형 펀드에 3년 이상 적립식으로 가입하면 가입 1년차에는 20%, 2년차에는 10%, 3년차에는 5%를 소득공제받을 수 있다. 가입한도는 분기별 300만원, 연간 1200만원 이내까지 적용된다.

조세일보 / 이동석 기자 dslee@jose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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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마미아

2008. 11. 28. 19:04

[Preview] 영화 <맘마미아!> Mamma Mia! the movie

 



INFORMATION

Title : Mamma Mia!

Cast : Meryl Streep, Pierce Brosnan, Colin Firth, Amanda Seyfried

Director : Phyllida Lloyd

Screenwriter : Catherine Johnson

Running Time : 109 minutes

UK Release: Jul 11 2008

US Release: Jul 18 2008

한국 개봉 : 2008 9 4http://www.mammamia-movie.kr/

 

 


Plot

소피(사이프리드) 어머니(메릴 스트립)에게 알리지 않고, 자신의 결혼식에 3명의 남자를 초대합니다. 그녀의 결혼식은 푸른 지중해 바다가 펼쳐지는 그리스에서 열릴 예정이고, 그녀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그렇습니다. 3명중의 하나가 바로 그녀의 아버지가 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머니인 도나만이 알고 있을 비밀이 과연 풀릴까요?

 

 

 

 

Preview

기대!

<맘마미아!>OST 듣고 나니 영화에 대한 기대가 더욱 높아집니다. 어차피 영화가 갖는 한계 때문에 뮤지컬의 감동을 그대로 느낄 수는 없겠지만, 새로운 느낌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특히 연기 잘하기로 소문난 메릴 스트립, 콜린 퍼스, 피어스 브로스넌 이라면 기대치는 더욱 상승할 밖에 없습니다.

 

<맘마미아!> 경우는, 내용이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것이니 줄거리나 따라가는 멍청한 짓을 해서는 영화를 완전히 느낄 없을 합니다. 그렇다면, 최소한아바 노래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먼저 듣고 가는 방법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맘마미아! OST관련 글] http://blog.naver.com/cinepark/120054662613

 

 

 

기획!

기획자의 입장에서 보면, 유명한 컨텐츠를 영화화하는 일은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관객들의 기대치는 상상할 없을 정도로 높고, 배우들 또한 비교당할까 두려워 출연을 꺼리니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미 영화화한 <오페라의 유령>이나 <맘마미아!> 좋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물론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면 바로쑤레기하면서 바로 불평을 쏟아내지만요.

 


재미!

아바 노래가 그랬듯, 영화 <맘마미아!> 영화를 보는 동안 즐겁고 흥겨운 마음을 갖게 준다면 그것으로 행복할 같습니다. 그런데, 먼저 개봉한 미국이나 영국에서의 네티즌 반응은 극찬하는 사람들과 생각보다 별로 였다는 사람들로 나뉘는군요. 여름에는 <다크나이트> 경험한 탓에 웬만한 영화들은 눈에 들어올 같지 않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109 동안 지중해의 푸른 바다를 보고, ‘아바 노래를 감상하는 정도면 만족하겠습니다.

 

/문성주


 

Mamma Mia! the movie trailer

http://kr.youtube.com/watch?v=l72Vm8LIQwI&feature=related



Mamma Mia The Movie “Gimme Gimme Gimme” (Original by ABBA)

http://kr.youtube.com/watch?v=aSqXC5jZ6yY&feature=related



Madonna - Hung Up : ABBA의 “Gimme Gimme Gimme”샘플링

http://kr.youtube.com/watch?v=pDlCymuf6x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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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결혼했다

2008. 11. 26.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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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두 남자와 결혼해 버린 발칙한 아내! 

‘결혼’이라는 결정적 한 골을 희망한 남자와 
2명의 골키퍼를 동시에 기용한 한 여자의 유쾌한 반칙 플레이
 

제2회 세계문학상 당선작 『아내가 결혼했다』가 출간되었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이중(二重) 결혼을 하려는 아내와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남편의 심리를 역동적인 축구 이야기와 절묘하게 결합시켜 오늘날의 독점적 사랑과 결혼제도의 통념에 대해 발랄하게 문제 제기를 하는 소설이다. 작가는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의 결혼관을 거침없이 소설로 끌고 들어와 시종일관 밀고 나가며 일처다부의 상황을 수용하게 만드는 도발적인 서사를 만들어 감으로써 일부일처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솔직하고도 대담한 판타지를 전개한다. 『아내가 결혼했다』의 서사가 갖고 있는 “배수진 없는 무모한 탈주는 일부일처제나 절대적 사랑의 시효가 만료되어 가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소유욕과 독점적 연애, 배타적 결혼관이 우리의 행복을 억압하는 방식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사랑과 인생, 축구 공식의 절묘한 교집합
 
『아내가 결혼했다』는 일반적 상식과 보편적 윤리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 전개와 단 세 명만이 등장하는 단순한 인물 구성에도 불구하고 “눈도 떼지 못하고 단숨에 빨려 들어가는 마법 같은 흡인력을 가진 소설”이다. 작가는 박학다식한 스포츠 마니아로서 사랑과 인생, 축구 공식의 교집합을 예리하게 포착했다. 축구 역사, 현재 활약하고 있는 축구 선수들의 인생과 그를 둘러싼 에피소드, 축구와 관련된 사건, 축구 상식 등에 관한 생생한 자료들을 사건과 상황의 흐름에 절묘하게 끌어들여 단순한 서사와 주인공의 심리 상태에 활력과 리얼리티를 불어 넣고 있다. 주인공은 저자가 견고하게 배치해 놓은 텍스트 사이를 종횡무진 오가며 동화되거나 숨거나 미끄러지거나 맞서거나 하면서 독자들을 소설 속 이야기 속으로 순식간에 끌어들인다. 또 마치 현대의 보편적인 윤리와 체계의 견고함에 잡학사전으로 맞서려는 것처럼 영화, 음악, 문학, 철학 등과 같은 다양한 문화 장르에서 성, 결혼, 행복에 관해 우리의 상식과 고정관념을 구성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배반하는 텍스트들을 치밀하게 배치해 밀도 있는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스토리를 끌어가는 작가의 노련하면서도 부드럽고 재치 있으면서도 세련된 설득력은 비독점적 다자연애라는 진중한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월드컵 결승전을 관전하듯 유쾌하고 경쾌하게 읽게 만든다. 

룰도 없는, 심판 맘대로의 난장판 축구 경기를 관전하는 즐거움 

박현욱은 이미 “무거움과 가벼움을 적절히 조화시킬 줄 알며, 소설의 생기와 활력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아는 작가”로 평가받았다. 『아내가 결혼했다』가 재미있는 이유는 전작들에서도 이미 보여 주었듯 “단순 무식한 얼뜨기 화자와 서술 주체가 유지하고 있는 그 화자에 대한 연민과 냉소가 교차하는 비평적 거리 때문이며, 무게 중심을 잃지 않는 쾌활한 템포” 때문이다. 작중 인물 인아는 자신의 의지대로 능청스럽고도 노련하게 반칙을 일삼아 가며 축구장의 경기를 진두지휘하며 끌고 가고, 사랑하는 여자를 소유하고 독점하기 위해 결혼을 감행한 덕훈의 인생은 인아의 플레이에 휘말리면서 완전히 빗나가며 뒤죽박죽이 된다. 소설 서두에 “인생은 축구장과도 같다”는 월터 스콧의 전언처럼 덕훈의 인생은 난장판이 된 축구장을 뛰는 한심한 선수 인생이 되어 버렸다. 제대로 골 한번 날려 보지 못하는 소심한 공격수에, 수비는 꿈도 못 꾸고, 한 골대에서 또 다른 골키퍼와 경쟁해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 속에 놓인 것이다. 새로 만난 연인과 또 결혼하겠다는 아내의 선언 앞에 덕훈은 그야말로 쿨해지려고 작심하나 사랑 때문에 절대로 쿨해질 수 없는, 그렇다고 소유욕에 불타서 미쳐 버리지도 못하는 평범한 30대 남성이다. 이러한 황당한 상황을 따라가는 주인공의 심리의 흐름에는 “세 번 웃다가 두 번 찡해졌다가 다시 세 번 웃게 하는 묘한 리듬이 숨겨져 있”으며 과격한 감정 표현과 반응에도 불구하고 미워할 수 없는 것은 딱한 처지 속에서도 주인공의 “순정하고도 애틋하며 발랄한 정서”가 읽히기 때문이다. 주인공 덕훈은 결국 쿨해지거나 미쳐 버리지 않는다. 그러는 순간 경기는 종료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인생은 축구장과 같다”는 월터 스콧의 전언이 다시 상기되고, 이 묵직한 말은 사랑과 행복의 추구를 위해 통상적인 축구장의 룰을 넘어서는, 반칙에 룰도 없는 뻘밭이 된 축구장을 뛰는 주인공들을 유쾌하게 지켜보게 만든다. 진중한 주제의식을 밀어 붙이는 난감하고도 도발적인 이야기를 읽어 나가며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이유는 또 소설 속 선수들의 고독한 플레이를 보고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축구공의 진실. 
축구공 안에 담겨 있는 위대함이란 어떤 행복과 관련된 어떤 것이다. 
축구공이란 행복과 가까운 데 있는 무엇이다. 
축구공이란 바로 행복이다.
 

“중학교 시절, 한 반의 인원은 60명이 넘었다. 체육 시간에 이런 축구를 했다. 체육 선생은 서른 명씩 두 팀으로 나누고는 축구공 두 개를 던져 주었다. 오프사이드? 있을 리 없다. 파울? 그런 거 모른다. 당연히 프리 킥이나 패널티 킥 같은 것도 없다. 코너킥도, 스로우 인도 없다. 모두들 공을 쫓아 열심히 뛰어다녔다. 골을 넣으려고? 아니. 한번이라도 공을 차보려고. 각각의 골대에서 동시에 골이 터지기도 했고, 골대 하나에서 한꺼번에 두 골이 터지기도 했다. 스코어는? 몰라. 우리 팀이 이겼던가? 상관없어. 그저 수업이 끝나는 것을 알리는 종소리가 조금이라도 늦게 울리기만을 바랐다.” p.336~337 

줄거리 

연애 모든 것은 축구로부터 시작되었다. 인아는 프로그래머였다. 그녀는 축구를 좋아했으며 FC 바로셀로나의 열렬한 팬이었다. 나는 평범한 회사의 평범한 직원이었다. 나야말로 축구를 좋아했다. 그녀가 축구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도 나를 사랑했다. 

나는 그녀가 나만 사랑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나만 사랑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를 독점하기 위한 가장 유력한 방법은 결혼이었다. 
그녀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청혼을 거절했다. 

공은 둥글고 꿈은 이루어지며 대한민국은 월드컵 4강이라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나는 그녀를 설득했다. 공은 둥글다고.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라고. 결혼 후에도 ‘지금’처럼, ‘이대로’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끈질기고 집요한 설득 끝에 결국 그녀로부터 결혼 동의를 받아 낼 수 있었다. 

결혼 결혼 생활은 행복했다. 나는 아내의 인생관을 존중하기로 했다. 진실로 쿨한 남편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아내는 회사 일 때문에 경주로 내려갔고 우리는 주말 부부가 되었다. 
경주로 내려간 뒤 반년쯤 지난 후였다. 아내는 폭탄선언을 했다. 아내의 얘기는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둘 중 어느 누구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면 놓아주기로 한 결혼 전의 약속대로 이혼에 동의하려 했으나 아내의 말은 이혼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나와 헤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내는 복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나는 아내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어 아내를 설득하고 회유하고 협박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아내의 남자를 만났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역시 아내처럼 이 황당하고도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이었다. 최후의 방법으로 아내에게 이혼 서류를 내밀었지만 그 작전도 아내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내 인생의 비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내 선택은 ‘전부를 가질 수 없다면 반이라도 갖겠다’고 말하는 것뿐이었다. 
[강컴닷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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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결말... 선입견인가... 주입식교육으로 인한 사고의 획일화인가...
어찌됐건 문학으로서는 훌륭하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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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 하루하루

2008. 11. 26. 18:30

빅뱅 하루하루 뮤직비디오 떠나가 Ye, the finally I reallize That I'm nu'ttin without you I was so wrong, forgive me 파도처럼 부숴진 내 맘 바람처럼 흔들리는 내 맘 연기처럼 사라진 내 사랑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아 한숨만 땅이 꺼지라 쉬죠 내 가슴속에 먼지만 쌓이죠 Say goodbye Ye, 네가 없이는 단 하루도 못 살 것만 같았던 나 생각과는 다르게도 그럭저럭 혼자 잘 살아 보고싶다고 불러봐도 넌 아무 대답 없잖아 헛된 기대 걸어봐도 이젠 소용없잖아 네 앞에 있는 그 사람이 뭔지 혹시 널 울리진 않는지 그대 내게 보이긴 하는지 벌써 싹~ 다 잊었는지 걱정되 다가가기 조차 말을 걸 수 조차 없어 애 태우고 나 홀로 밤을 지새우죠 수백번 지워내죠 돌아보지 말고 떠나가라 또 나를 찾지 말고 살아가라 너를 사랑했기에 후회 없기에 좋았던 기억만 가져가라 그럭저럭 참아볼만해 그럭저럭 견뎌낼만해 넌 그럴수록 행복해야되 하루하루 무뎌져가네 에 에 에 Oh! girl i cry cry yo my all say goodbye 곁을 걷다 너와 나 우리 마주친다 해도 못 본척 하고서 그대로 가던 길 가줘 자꾸만 옛 생각이 떠오르면 아마도 나도 몰래 그댈 찾아갈지도 몰라 넌 늘 그 사람과 행복하게 넌 늘 내가 다른 마음 안 먹게 넌 늘 작은 미련도 안 남게 끔 잘 지내줘 나 보란 듯이 넌 늘 저 하늘같이 하얗게 뜬 구름과도 같이 새파랗게 넌 늘 그래 그렇게 웃어줘 아무일 없듯이 돌아보지 말고 떠나가라 또 나를 찾지 말고 살아가라 너를 사랑했기에 후회 없기에 좋았던 기억만 가져가라 그럭저럭 참아볼만해 그럭저럭 견뎌낼 만해 넌 그럴수록 행복해야되 하루하루 무뎌져가네 에 에 에 나를 떠나서 맘 편해지길 나를 잊고서 살아가줘 그 눈물은 다 마를테니 예 하루하루 지나면 차라리 만나지 않았더라면 덜 아플텐데 음 영원히 함께하자던 그 약속 이젠 추억에 묻어두길 바래 Baby 널 위해 기도해 돌아보지 말고 떠나가라 또 나를 찾지 말고 살아가라 너를 사랑했기에 후회 없기에 좋았던 기억만 가져가라 그럭저럭 참아볼만해 그럭저럭 견뎌낼만해 넌 그럴수록 행복해야되 하루하루 무뎌져가네 에 에 에 Oh! girl i cry cry yo my all say goodbye bye Oh! my love don't lie lie yo my heart say goodbye
Posted by hjlee
:

무음 wav 파일

2008. 11. 14. 19:09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Posted by hjlee
:

[QT/Win32] Qt Win32 opensource 4.3.2 + Eclipse IDE for C/C++ Developers 개발환경 설정

1. 개요
Qt로 윈도우에서 개발하기 위해서는 상용버전의 Qt를 사면 Visual Studio와 연동되는 Qt를 얻을 수 있지만, opensource버전을 이용해서 IDE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던중
eclipse와 연동되는 것을 해보았습니다.

2. Eclipse IDE for C/C++ Developers 설치
2.1 JRE설치
eclipse는 java로 만들어 졌기때문에 eclipse를 실행하려면 java runtime이 필요합니다.
다음의 URL에서 다운로드 가능합니다.

2.2 eclipse 설치
먼저 eclipse 공식홈페이지에 가서 Eclipse IDE for C/C++ Developers를 다운로드 받은다음 압축을 해제합니다.
별도의 설치과정이 없기때문에, 압축해제한 파일을 적당한 디렉토리로 이동시켜놓으면 끝입니다.
저의경우에는 c:\Eclipse 디렉토리로 이동시켜 두었습니다.

2.3 Eclipse CDT plug-in 설치
eclipse에서 c/c++개발환경을 위해서는 CDT plugin이 필요합니다.
다음의 위치에서 다운로드를 받아서 압축을 해제하면 plugins, features디렉토리가 생성되는데, 이 두 디렉토리내의 파일을 eclipse의 plugins, features디렉토리로 복사를 합니다.

2.4 mingw설치
Eclipse는 기본적으로 c/c++컴파일러가 없기때문에 mingw의 c/c++컴파일러를 설치합니다.
다음의 URL에 가서 mingw를 받은다음 MinGW-5.1.3.exe를 실행합니다.
여기에서 gcc, g++을 선택하여 설치를 합니다.

설치가 모두 마친다음 eclipse에서 mingw의 컴파일러를 참조하기 위한 PATH를 걸어줍니다.
윈도우 환경변수 PATH에 c:\mingw\bin을 설정합니다.

또한, eclipse에서는 컴파일을 할때 make.exe를 참조하게 되어 있는데, c:\mingw\bin에는 make.exe라는 이름대신에 mingw32-make.exe만 존재합니다.
eclipse환경설정에서 make.exe대신에 mingw32-make.exe로 변경해 주면 되지만
그냥 간편하게 mingw32-make.exe파일을 make.exe라는 이름으로 하나 더 복사합니다.

2.5 이제 eclipse를 실행해서 new project로 c++ application을 하나 만든다음
컴파일 (Ctrl + B) 하고 실행 (Ctrl + F11)을 해봅니다.
아래에 console에 hello, world가 찍히면 성공입니다.
만약 컴파일 에러가 난다면 위의 2.4부분의 환경변수를 확인해 보세요.

3. Qt 설치
3.1 Qt 다운로드
Qt소스는 trolltech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다운로드 받은파일을 적당한 디렉토리에 압축을 해제합니다.
그리고 나서 적당한 이름으로 변경해줍니다. 저의 경우에는 c:\Qt\4.3.2 라는 디렉토리로 위치와 이름을 수정했습니다.(상용버전을 설치하면 이렇게 되거든요)

3.2 Qt 컴파일
Qt를 컴파일 하기 위해 먼저 윈도우 환경변수 PATH에 Qt위치\bin 디렉토리를 설정합니다.
저의 경우 PATH에 c:\Qt\4.3.2\bin이라는 형식으로 추가하였습니다.

이제 시작 -> 실행 -> cmd를 실행해서 dos command창에서 c:\Qt\4.3.2 디렉토리로 이동합니다.
Qt를 Visual Studio .NET 2003컴파일러를 이용해서 컴파일 하기 위해서
"C:\Program Files\Microsoft Visual Studio .NET 2003\Vc7\bin\vcvars32.bat"를 실행합니다.(이때 반드시 "를 붙여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제대로 명령이 안먹습니다.)
C:\Qt\4.3.2>"C:\Program Files\Microsoft Visual Studio .NET 2003\Common7\Tools\vs
vars32.bat"
Setting environment for using Microsoft Visual Studio .NET 2003 tools.
(If you have another version of Visual Studio or Visual C++ installed and wish
to use its tools from the command line, run vcvars32.bat for that version.)

위와같이 나오면 제대로 실행된것입니다.
이제 configure설정을 합니다.
C:\Qt\4.3.2>configure -platform win32-msvc.net

이것은 qt의 프로젝트파일인 .pro를 생성하기 위한것인데, 조금 오래걸립니다.

위 작업을 모두 마치면 이제 아래와같이 컴파일을 합니다.
C:\Qt\4.3.2>nmake

이것은 엄청나게 오래걸립니다.
컴파일이 완료되면 모두 끝납니다.

3.3 Qt eclipse integration설치
eclipse에서 Qt용 프로젝트 생성 이나 Qt디자인등을 하기 위해서는 trolltech에서 제공하는
Qt Eclipse Integration을 설치하면 됩니다.
다음의 URL에서 다운로드 하면 됩니다.

4. Eclipse 실행
위과정까지 모두 마찬후에 eclipse를 실행하면 Qt를 Visual Studio .NET 2003컴파일러로
컴파일 했기때문에 제대로 컴파일이 안됩니다.
이것은 환경변수가 설정이 안되어 있어서 그런것인데,
설정해 주어야 할 것이 너무 많고해서 저의 경우 다음과 같이 설정을 하였습니다.

먼저 C:\Program Files\Microsoft Visual Studio .NET 2003\Common7\Tools\vsvars32.bat파일을 eclipse디렉토리로 복사해서 vsvars32.bat의 아래부분에 eclipse를 실행하는 코드를 넣고 vsvars32.bat를 eclipse_msvc.bat로 변경한다음에 eclipse_msvc.bat로 항상 실행한다.

vsvars32.bat 수정사항
@set LIB=%MSVCDir%\ATLMFC\LIB;%MSVCDir%\LIB;%MSVCDir%\PlatformSDK\lib\prerelease;%MSVCDir%\PlatformSDK\lib;%FrameworkSDKDir%\lib;%LIB%

출처 : http://tong.nate.com/kangdydtjs/44533197

Posted by hjlee
:

자기위안

2008. 9. 9. 10:52
2보 전진을 위한 1보의 후퇴다.
결국 나는 너에게로 가고 있다.
시간이 조금 늦춰지는 것일뿐...
Posted by hjlee
:
광복 63주년이 지나도록 우리 사회에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린다'는 속설이 상식처럼 굳어져 있다. 과연 현실은 어떨까. < 시사IN > 은 이 속설이 믿을 만한지 알아보기 위해 그 실상을 직접 들여다보기로 했다.



조사 범위는 매국 조약 체결 등에 가담해 그 대가로 귀족 작위와 은사금, 은사 토지를 하사받은 매국형 친일파 10여 명과 그 후손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또 일제 식민지 통치기구의 국회 격이라 할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참의를 지낸 상당수 친일파 후손도 살펴보았다. 대표적 친일파 명단을 놓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족보를 추적해 확인 가능한 후손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방법으로 진행했다.

독립운동가의 경우는 임시정부 요인과 기미독립선언에 참가한 33인 대표, 그리고 안중근 의사와 도산 안창호 선생, 단재 신채호 선생 등 민족의 선각자들 후손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20~25쪽 딸린 기사 참조).

결론부터 말하면 3대 이상 흥한 '대표 친일파' 후손은 '대표 독립운동가' 후손보다 훨씬 많았다.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흥한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잖은 친일파 후손이 사회 각계에 포진해 대를 이어 기득권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선 매국 조약 체결 등으로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친일파부터 살펴보자. 구한말 군부대신으로 을사늑약을 조인하고, 1910년 한·일 병탄 조약 체결에도 간여한 을사오적 이근택의 집안은 대표 친일파 가계로 통한다. 그의 형 근호와 동생 근상이 함께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는데 습작자까지 합치면 조선 귀족을 6명 배출한 집안이다. 이 때문에 일제 식민지 지배 당시에도 독립지사들은 이근택 5형제를 '5귀'라 부르며 지탄했다.

1910년 한·일병탄 뒤 일본 정부에서 훈1등 자작을 수여받은 이근택은 작위를 아들 창훈에게 습작했다. 창훈의 두 손자는 광복 후 교육 분야에 진출해 활약해왔다. 1998년 세상을 뜬 맏아들 이상우씨는 공주대 총장을 역임했고, 동생은 현재 공주대 물리학과 명예교수이다. 이근택의 형 이근호도 1910년 한·일병탄 조약 체결 공로로 남작 작위를 받아 매국형 친일파로 분류된다. 그의 후손은 2005년까지 선대의 친일 재산을 되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9건 낸 적도 있다.

교육계에 뿌리 내린 '자작 민영휘' 후손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작위를 받은 친일파 중 교육 분야에 뿌리를 내린 또 다른 집안으로는 '자작 민영휘' 후손을 꼽을 수 있다. 구한말 조선왕족이던 민영휘는 한·일병탄 직전 일제의 조선 병합을 지지하며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친일 매국 단체 간부로 이름을 올리고 활동했다. 그 공로로 병합 당시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매국공채 5만원을 받았다. 초기에 관직을 이용해 모은 재물을 불려 일제 강점기 조선 최대 갑부 반열에 올라섰다.귀족 출신으로는 드물게 대자본가로 변신한 민영휘는 일제하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분류된다.

민영휘의 후손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자리한 휘문고교를 상속받았다. 민영휘의 증손 민덕기씨는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풍문여고를 세웠다. 학교법인 휘문의숙은 민영휘의 증손자인 민인기씨가, 풍문학원은 고손자인 민경현씨가 각각 이사장을 맡았다. 현재 휘문고 교정에는 민영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다른 후손의 사회 진출도 화려한 편이다. 막내 아들의 장남인 민병도씨는 제일은행장과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민병도씨의 장남 민웅기씨는 텔레비전 드라마 < 겨울연가 > 촬영지로 유명한 강원도 춘천의 남이섬 유원지를 소유하고 있고, 둘째 아들도 기업체를 경영한다.

민영휘의 후손은 광복 뒤 이승만 정부에서 휘문의숙을 세운 공로로 표창을 받았다는 점을 들어 민영휘를 친일파로 분류하는 데 불만이다. 그러나 일제 때 조선총독부도 교육 관련 표창장을 줬다는 점에서 그의 교육사업 진출이 친일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지적을 받는다.

1907년 대한제국 군부대신을 지내다가 한·일신협약 체결로 군대 해산에 앞장선 이병무는 '정미칠적'으로 분류된다. 해산된 군대가 의병을 일으키자 강경 진압했던 이병무는 한·일병탄 때는 시종무관장으로서 병탄 조약 체결에 협조해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병무의 자작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은 이는 입양 아들 이홍묵이다. 이병무의 증손자 이진씨는 5공화국 때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노태우 정부 초기 국무총리 비서실장과 환경처 차관을 역임한 그는 현재 웅진그룹 환경경영담당 부회장이다. 그는 대학과 기업을 오가며 경제와 환경의 통합을 강조하는 '친환경 경영체제' 주창자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경술국적' 민병석 아들, 대법원장 지내
한·일병탄 조약 체결에 가담해 '경술국적'으로 불리는 민병석은 이완용과 처내종 간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을사늑약 이후 이토 히로부미와 깊은 교분 관계를 맺었던 민병석은 1909년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가 쓰러지자 장례 조문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한·일병탄 공로로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다섯 차례에 걸쳐 역임한 대표 친일파였다. 큰아들 홍기씨는 민병석의 자작 작위를 세습했고, 둘째 아들 복기씨는 일제 때 경성제대 법과를 나와 식민지 사법부에 진출했다. 민복기씨는 집안의 친일 행적과 상관없이 정부수립 후 제 5·6대 대법원장을 맡는 등 법조계의 거물로 활약하다가 지난해 작고했다.

민복기의 세 아들 중 일본 히도쓰바시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장남 민경성씨는 일본계 기업체 사장이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아버지의 뒤를 이은 둘째 민경택씨는 서울지법 판사, 서울지검 검사 등을 거쳐 변호사로 일하다 작고했다. 서울대와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을 나온 셋째 민경삼씨는 기업인이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전권대신으로 조인을 총괄했던 박제순은 1910년 내부대신을 맡아 한·일병탄 조약 체결에도 앞장섰다. 그 공로로 훈1등 자작 작위를 수여받고 중추원 고문이 됐다. 박제순의 아들 박부양은 중추원 서기관이 되었고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과 나란히 조선 귀족 모임인 동요회 이사를 지내면서 일제 강점기 내내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의 아들 박승유씨는 서울대 음대와 미국 남가주 대학 음대를 졸업한 뒤 성악가로서 강원대 음대 교수를 역임했다.

조선 왕족의 종친 가운데도 구한말 귀족 작위를 받고 식민지 지배에 적극 협력한 사람이 있다. 이해승이 그런 경우다. 이해승은 한·일병탄 후 21세에 후작 작위와 매국공채 16만2000원을 받았다. 종친 가운데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낸 이기용과 함께 태평양 전쟁을 미화하는 등 적극 친일에 나선 이해승은 광복 후 반민특위에 끌려갔지만 이승만 정부가 반민특위를 해체하면서 풀려났다. 그는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이해승의 손자 이우영씨는 현재 서울 홍은동에 있는 그랜드 힐튼 서울호텔 회장 겸 동원 INC 회장이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지난해 이해승이 친일 대가로 경기도 포천에 조성한 토지 약 200만㎡(시가 300억원대)를 국가 귀속하기로 결정했다.

매국 조약 체결에 앞장선 친일파 후손 가운데는 멸문한 집안도 있다. 대한제국 법무형사국장으로서 명성황후 폐비 조처를 주도해 시해 사건을 돕고 10년간 일본으로 망명한 조중응이 그런 경우다. 일본에서 돌아와 이완용 내각 농상공부대신으로 한·일병탄에 앞장선 조중응은 그 공로로 자작 작위와 은사금 10만원을 받았다. 이후 중추원 고문을 맡아 친일에 앞장선 조중응은 정실부인을 서울에 두고도 일본 여성과 도쿄에서 따로 결혼해 슬하에 자녀를 뒀다. 자식이 없던 서울의 정실부인은 양자를 입적했지만 대가 끊겼고, 대신 일본 부인과 자녀가 조중응 사후 작위와 재산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러면 매국형 친일파 중 당대에 쌍벽을 이루며 나라를 팔아넘기는 데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는 이완용과 송병준의 후손은 어떻게 지낼까.

구한말 내각총리대신으로 한·일병탄에 앞장선 매국노의 상징 이완용은 병탄 후 중추원 고문으로 백작 작위와 은사금 15만원을 받았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 "일선 동화의 결실을 손상하는 경거망동과 황당무계한 유언 선동을 중지하라"고 만세운동 비난 담화를 발표해 그 공로로 1920년 후작으로 승작했다. 1926년 이완용이 사망한 후 귀족 작위와 재산은 손자 병길이 습작했다.

이병길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이완용의 직계 종손인 이윤형씨가 상속권자다. 일제 때 일본인 고위 관료 자녀의 교육기관이던 경성제1사범대 부속학교를 거쳐 동성고교와 홍익대를 나온 그는 광복 뒤 한동안 숨어 지내다가 1960년대 말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의 발탁으로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을 지냈다. 그 뒤 17년간 캐나다에서 살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국내에 들어와 이완용 땅찾기 소송에 뛰어들어 한때 승소 판결로 수십억원을 챙기기도 했다.

한편 이완용의 셋째 손자(이병길의 동생)인 이병주씨는 1962년 9월21일 일본으로 밀항해 들어가 일본 정부에 생활 보장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그를 귀화시키고 환대했다. 일본에 귀화한 이병주의 아들 이석형씨는 1979년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뒷산에 있던 이완용 부부의 묘를 파내 화장해버렸다. 이완용의 관 뚜껑에는 일왕이 부여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위대훈위 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阮 副議長 二位大勳位 牛峯李公之柩)'라 쓰여 있었다. 작업하던 인부가 이 관 뚜껑을 인근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전달해 한동안 역사 자료로 소장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있던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이 소식을 듣고 내려와 원광대 총장을 설득해 가져다 태워버린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친일 사학자라고 비판받던 고 이병도 박사는 이완용과 우봉 이씨 집안 친척이다. 고 이병도씨의 두 아들이 현재 서울대학교 이장무 총장과 이건무 문화재청장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씨의 오랜 땅찾기 작업은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조사와 국가 귀속 조처로 현재는 주춤한 상태다.

송병준 후손, 집요하게 '땅 찾기' 나서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던 매국노 송병준은 구한말 농상공부대신과 내부대신을 역임하며 한·일병탄 때는 친일 매국단체 일진회 총재 자격으로 병탄에 앞장선 인물이다.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왕실재산조사위원장을 맡아 전국 각지의 토지대장 수천만 평에 자기 이름 석 자를 세겨넣은 송병준은 1925년 뇌일혈로 숨졌는데, 재산과 작위는 아들 송종헌이 물려받았다. 송종헌 역시 중추원 참의를 지내면서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전국적 세도가로 행세했다.

그의 아들 송재구는 일본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뒤 1930년 홋카이도에서 '조선목장' 약 2640만㎡를 경영했다. 광복 후 송종헌은 용인군 내사면 추계리 99칸짜리 저택과 전답을 긴급 처분한 뒤 서울로 피신했으나 반민특위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49년 뇌일혈로 사망했다.

송재구의 아들이 바로 송돈호씨로 서울 역삼동에서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서울·인천·경기·강원 등지에 걸쳐 있는 송병준 명의 토지 상속소송을 주도하며 각종 사기 사건을 일으키다가 2007년 4월 구속됐다. 올해 초 보석으로 나온 송돈호씨는 최근 헌법재판소에 친일재산 특별법 위헌소송을 냈다가 기각당하는 등 여전히 송병준 땅 찾기에 집요하다.

친일 대가로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은사금, 은사 토지를 받은 매국형 친일파 후손보다 광복 후 사회·경제적으로 더 강고한 기득권을 구축한 친일파 후손이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던 그룹이 그들이다. 요즘으로 치면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중추원 참의는 1910년 한·일병탄 직후부터 임명되기 시작해 광복 때까지 70여 명이 거쳐갔다. 1910년 10월 초대 참의 임명자는 종신직이었지만 1921년부터는 3년 임기로 일제 식민지배 공헌도에 따라 돌아가며 역임했다. 오랜 친일 행적이 쌓여 공로를 인정받아야 참의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역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친일파로 분류된다.

호남 지방의 대지주였던 김연수는 일제 때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경성방직을 경영했다. 친일 기업인으로 활동한 그는 1935년 총독부가 발간한 < 조선공로자명감 > 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경성방직 사장 직함과 함께 수록돼 있다. 1940년 중추원 참의를 맡은 김연수는 태평양 전쟁 때 거액의 국방헌금을 기부하면서 군수산업에 뛰어들었다. 이 기간 중 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임전보국단·국민의용대 등 친일 단체 간부로서 각지를 돌며 학병 지원 연설을 많이 벌였다. 광복 뒤 반민특위에 체포됐다가 특위가 해체되면서 풀려난 김연수는 1961년 전경련의 전신인 전국경제협의회장을 맡는 등 재계 원로로 행세했다.

김연수는 7남6녀를 두었는데 장남 고 김상준은 삼양염업 명예회장, 차남 고 김상협은 16대 국무총리를 지내고 작고했다. 3남 김상홍은 현 삼양사 명예회장, 5남 김상하는 삼양사 회장을 맡고 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같은 신체시로 이름을 알린 육당 최남선도 중추원 참의 출신이다. 3·1운동 때 문화계 대표로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최남선은 그 후 변절해 일제 식민사관을 유포하던 어용단체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고,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최남선 역시 광복 뒤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처벌은 면했다.

최남선의 장남 최한웅 교수는 서울대 의대 소아감염학 권위자로 이름을 날렸다. 최남선의 맏손자는 피부과 전문의이고, 또다른 손자는 경기대 경영학부 교수로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사업가로 명성을 떨친 문명기도 참의 출신 친일파로 분류된다. 제지업과 수산업, 금광 개발에 뛰어들어 부를 쌓은 그는 태평양 전쟁 때 국방헌금을 냈다. 아울러 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조직해 비행기 헌납운동을 벌이며 가미카제 특공대를 옹호하는 친일 활동을 폈다. 또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 함대를 물리치기 위한 일제 해군 '헌함운동'도 벌이며 앞장서 자기의 광산을 일제에 기부했다. 이런 공로로 1941년 중추원 참의가 됐다.

그의 맏손자인 문태준은 서울대 의대와 미국 토머스제퍼슨 대학원을 수료한 뒤 7대부터 10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현재 남평 문씨 대종회장이다.

'친일 내력' 노출되는 정치권 진입 적어
정치인 가운데도 일제 시대 중추원 참의를 선조로 둔 이가 있다. 강릉 갑부로서 1936년 중추원 주임참의에 임명된 후 1941년 연임한 최준집의 아들 최돈웅 전 의원이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자기 회갑연을 취소하고 국방헌금으로 1000원을 납부한 사실이 매일신보에 보도될 정도로 일제에 충성했다. 그의 아들 최돈웅씨는 8·14·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2년 대선 때는 이회창 후보의 대기업 상대 불법 선거자금을 거둔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특사로 풀려났다.

재계의 거물 중 선대가 중추원 참의인 경우도 있다. 호남의 대표 친일 부호로서 1930년 중추원 참의가 된 현준호의 후손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다. 1920년 호남은행을 설립해 대표를 지낸 현준호는 한때 민립대학 설립 등 민족교육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1930년 중추원 참의가 되고부터 지역 간척사업 이권을 따내는 등 일제와 밀착 행보를 보이며 민족운동과 결별했다.

현준호 역시 1935년 총독부 편찬 공로자 명단에도 올랐다. 중·일전쟁 발발 후 총독부가 조직한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나서 전쟁 지원을 역설했던 그는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징병제 홍보와 학병 지원 권유 등에 적극 가담했다.

현준호는 한국전쟁 시기에 북한군에 피살됐다. 현준호의 후손은 대개 재계로 진출했다. 현우실업 대표인 현양래는 현준호의 손자이다. 현주호의 아들 고 현영원씨는 현대상선 회장을 지냈다. 현영원씨는 딸 넷을 두었는데 둘째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다. 현 회장은 1955년생으로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1976년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과 결혼해 현대가와 혼맥으로 연결됐다.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은 현정은 회장의 어머니인 김문희씨의 동생이라서 두 사람은 외삼촌과 조카 사이이기도 하다.

친일파 후손의 사회 진출에서 특징은 학계·경제계·관료·문화예술 분야에 몸담은 이가 많다는 점이다. 정치 분야 진출도 없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그 수는 적었다. 이는 후손이 선거운동 등에서 자기의 집안 내력이 노출되는 정치권 진출을 꺼렸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이들 대표적인 친일파 후손이 현재 사회·경제적으로 '잘나간다'고 해서 무턱대고 조상의 친일 '덕분'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 일제의 악랄한 탄압에 가산을 탕진하고 온갖 고초를 겪었던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에 비해 친일파 후손은 선대가 만들어준 '요람'에서 근대적 교육 기회를 충분히 누리거나 유산 상속 등으로 출발부터 남달랐다. 비교적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친일파 후손까지도 경제 형편은 유복한 편이었다. 아직도 조상이 친일 대가로 조성해둔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국가기관을 상대로 법정 다툼을 벌이는 경우도 많다. 광복 63주년을 맞아 민족정기 확립을 위한 국민의 관심이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희상 기자·이재덕 인턴 기자 /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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